{1} 머리말
 체스(서양장기)는 기물의 모양으로써 각각의 역할을 표시하고, 쇼기(将棋, 일본의 장기)는 기물에 두 글자로 이루어진 낱말(飛車, 桂馬, 步兵 등등.)을 새긴다.

 

이들과는 달리 우리 장기는 기물 하나에 단 한 글자의 한자만 새겨 역할과 움직임을 표시한다. '수레 차(車)'라는 글자로 전후좌우로 길게 뻗는 움직임을 표현하고, '군사 졸(卒)'이라는 글자로 기동성은 떨어지지만 싸움에 임하면 물러서지 않는 말단 병사의 용맹함을 표현한다. 나라 이름인 楚와 漢을 제외하고, 장기짝에 새겨진 글자들의 뜻은 행마법과 큰 관련이 있다.

 장기짝은 모두 개성 있는 행마를 한다. 행마에 깃든 개성만큼이나 각각의 글자 자체에도 개성이 깃들어 있다. '장기짝에 새긴 한 글자' 시리즈에서는 이 글자들이 가진 의미를 장기와 관련지어 볼 것이다. 상편은 인류의 유용한 이동·운송 수단이자 훌륭한 전쟁 도구인 '車(수레 거/차)'와 '馬(말 마)'에 대한 이야기다. 수레와 말은 인류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이고, 장기판에서도 주축이 되는 존재들이다.

{2} 車, 직선들 속에 숨은 곡선의 겸손한 아름다움

 車는 '종횡무진(縱橫無盡, 가로세로로 다함이 없음.)'이라는 말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장기짝이다. 앞이든 옆이든 뒤든 가고 싶은 만큼 갈 수 있다. 가로막는 기물이 없다면 장기판 한쪽 끝에서 다른 편 끝으로 한번에 갈 수도 있다. 이처럼 움직임이 시원시원하고 직선적이어서 장기를 처음 가르칠 때 행마법을 가르치기도 가장 쉬운 기물이다. '車(수레 거/차)'라는 글자 자체도 8개의 가로세로 직선(획수로는 7획이다.)으로 이루어져 그 모양이 단순하다. 글자 모양과 행마법이 꼭 닮은 것이다. 하지만 직선으로만 다닐 수 있는 행마법과는 달리, '車'라는 글자에는 알고 보면 곡선이 숨어 있다.

'車'는 상형(象形)문자다. 간단한 구조의 수레(군더더기 없이 수레에 꼭 필요한 요소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다. 이 수레는 몸체(사람이나 짐을 싣는 공간), 굴대(바퀴의 축), 두 개의 바퀴로 이루어져 있다. 위 그림을 보자. 왼쪽부터 수레의 몸체, 바퀴, 굴대를 보라색으로 표시한 것이다. 즉 가운데의 '田' 모양이 몸체, 그 위아래로 하나씩 있는 'ㅡ' 모양이 바퀴, 두 개의 바퀴를 관통하는 'ㅣ' 모양이 굴대다. 좌우로 굴러다니는 수레를 위에서 보니 모두 직선 같아 보이지만, 이 수레를 앞이나 뒤에서 본다면 동그란 모양의 수레바퀴가 정확히 보일 것이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누군가는 "종이", 누군가는 "전구", 누군가는 "증기기관"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자신 있게 "바퀴"라고 답할 것이다. 필자와 같은 대답을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동그란 바퀴가 달린 수레 덕분에 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무거운 것을 손쉽게 옮길 수 있다. 우리는 바퀴와 수레 덕분에 전국이 일일생활권인 시대에 살고 있다.

 바퀴는 수레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바퀴는 장기판 위에서 車가 내뿜는 파괴력의 원천이다. 또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글자 '車'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위아래에 달린 바퀴다. 역설적이게도, 쭉쭉 뻗는 직선적인 힘이 바퀴의 동그란 곡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車의 바퀴는 직선들 속에 겸손하게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행마에서도 곡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고 직선의 청량감만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진정한 힘을 가진 것은 몸체나 굴대와 같은 직선이 아니라 바퀴의 동그란 곡선이다. 車의 행마에서 바퀴가 처신하는 법을 보고 겸양과 외유내강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수레는 늘 직선으로만 다니지는 못한다. 방향을 꺾어 곡선으로 움직인 수레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당랑당거철[螳螂當車轍,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맞섬.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고도 한다.]이라는 말과 관련된 일화다. 당랑당거철은 <<장자>>의 <인간세편>과 <<회남자>>에 나오는 표현이다. 제나라 장공(莊公)이 수레를 타고 가는데, 사마귀가 앞다리를 치켜들고 수레바퀴에 맞서자 사마귀의 용맹함에 감탄한 장자가 수레를 살짝 돌려 사마귀를 피해 갔다는 이야기가 이 표현의 유래다. 세차게 직선으로 뻗어 나가야 될 수레가 곡선의 바큇자국을 그리며 사마귀의 죽음을 막은 것이다.

{3} 馬, 장기판 위의 용맹하고 든든한 친구

 '車가 없는 장기판에는 馬가 왕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馬는 車와 더불어 공수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일반적으로 包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겨지지만 장기를 두다 보면 包보다 馬가 유용한 순간이 자주 나온다.

 말은 빠르고 힘이 좋아서 예로부터 가장 유용한 동물로 여겨졌다. 윷놀이에서도 돼지(도), 개(개), 양(걸)과 농경 사회의 보물인 소(윷)까지 제치고 말(모)이 가장 으뜸으로 취급된다. 말이라는 동물이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에 따라, 언어생활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말 꼬리에 파리가 천 리 간다",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등등 말에 관련된 속담도 많고, '마력(馬力, 일의 양을 나타내는 단위 중 하나)', '마각(馬脚, 가식하여 숨긴 본성이나 진상)' 등 일상적으로 쓰는 낱말에도 '馬' 자가 들어가는 것이 꽤 있다.

 중국 한나라의 학자 허신(許愼, 30~124)의 저서 <<설문해자>>에 따르면, '馬'라는 글자는 '武(굳셀 무. 주로 전쟁이나 무술과 관련된 뜻으로 쓰인다.)'의 뜻도 지닌다. 한 예로, 고대 중국에는 '대사마(大司馬, 군사와 국방에 관한 일을 총괄하는 직책)'라는 벼슬이 있었다. 이때의 '馬' 자가 '武'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또, 우리말에서 '말'이 접두사로 쓰이면 '큰'의 뜻을 더한다.  말벌(馬蜂), 말매미(馬蜩), 말거머리(馬蛭) 등이다. 한 학술 논문에 따르면 이 현상은 중국어(馬)와 몽골어(morin)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상황에 따라 '武'의 의미로도 쓰이고 '크다'의 의미로도 쓰이니, 말이라는 동물이 용맹하고 든든한 이미지를 갖고 있음은 틀림없다.

 

장기 이야기로 돌아와서, 말을 상징(象徵)하는 기물은 전 세계 대부분의 장기에 있으며, 행마법도 다들 비슷비슷하다. 샹치(象棋, 중국의 장기)의 馬/傌는 우리 장기의 馬와 행마법이 완전히 같다. 체스에서 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이트(knight)'는 馬처럼 움직이지만, 멱이 막혀 있어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점에서 馬보다 활용하기 편하다. 막룩(หมากรุก;, 타이의 장기)의 '마(ม้า)'도 나이트와 같은 행마를 하고 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쇼기에는 '케이마(桂馬)'라는 기물이 있는데 두 칸 전진 후 좌우로 한 칸 가는 날일자 행마를 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馬를 통상적으로 '마'라고 부르지만, 글자의 소리가 아닌 뜻을 따라 '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꽤 많다는 것이다. 필자도 馬를 '마'보다는 '말'이라고 많이 부른다. '마'와 더불어 '말'이 사전에도 등재돼 있다. 사전에 '말'을 찾으면 뜻풀이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민속』 고누나 윷놀이 따위를 할 때 말판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옮기는 패.

 「2」 『체육』 ‘馬’ 자를 새긴 장기짝. 한 편에 둘씩 넷이 있고, 앞으로 두 칸 옆으로 한 칸, 또는 앞으로 한 칸 옆으로 두 칸 건너 있는 밭으로 다닌다. =마.

 이 뜻풀이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누나 윷놀이에 쓰이는 '말'과 '馬' 자가 새겨진 장기짝인 '말'이 같은 단어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포유동물 '말(horse)'과 고누나 윷놀이의 '말(piece)' 간에 연관성이 있다는 뜻이다. '행마(行馬)'는 장기나 바둑에서도 쓰는 용어이지만, 고누나 윷놀이 또는 기타 보드게임에서 말(piece)을 움직이는 것도 행마라고 한다. 이는 '말(piece)'과 '말(horse)'을 동일시하는 표현이다. 또한, '말(piece)'과 '말(horse)' 모두 최초의 형태가 ''로 같은 형태를 띤다. 따라서 필자는 '말(horse)'이라는 낱말에서 '말(piece)'의 의미가 파생된 것으로 추측한다. 물론 더 연구해서 정확히 밝혀야 할 일이다.

{4} 맺음말
'장기짝에 새긴 한 글자' 상편에서는 '車'라는 한 글자에서 곡선으로 이루어진 수레바퀴의 겸손을 읽어 냈고, '馬'라는 한 글자가 갖는 여러 가지 의미를 살펴봤다. 장기판 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車와 馬는 서로 사이도 좋아서 마차(馬車), 거마비(車馬費, 교통비를 이르는 말) 등 한 낱말 안에서 같이 쓰이기도 한다.

중편에서는 다른 기물들보다 크기도 작고 이동 범위도 좁지만, 죽음을 불사하는 희생정신을 가진 士와 卒兵이 장기판 안팎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기술하겠다.

                                                                   글. (사)대한장기협회 최민혁 2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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