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보다 의리를 중시한 장수 번어기는 형가 자진을 돕기위해 자진해서 자신의 수급을 바쳤는 고사의 상상도(사진=중국 바이두)
목숨보다 의리를 중시한 장수 번어기는 형가 자진을 돕기위해 자진해서 자신의 수급을 바쳤는 고사의 상상도(사진=중국 바이두)

[월간 기담(棋談)]

4. 묘수풀이

- 형가와 번오기 -

{1} 문제도

 이번 글에서는 필자가 직접 만든 묘수풀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건너뜀연장군묘수풀이이며, '형가(荊軻)와 번오기(樊於期)'라고 제목 지었다. 묘수풀이는 漢이 선수로 이기는 문제를 만드는 게 일반적이지만, 좌표를 보다 쉽게 읽기 위해 楚가 선수로 이기게끔 문제를 만들었다.

 정답을 해설하기 이전에, 묘수풀이에 대한 설명과 형가와 번오기의 고사를 먼저 붙이겠다. 해설을 바로 보고 싶다면 스크롤을 조금 내려서 {2}와 {3}을 건너뛰고 {4}로 넘어가도 좋다.

 

{2} 묘수풀이란

 묘수풀이에 대해 잠깐 설명할 텐데, 김경중 국수께서 운영하시는 네이버 카페 '장기사랑 아카데미'에 직접 올리신 게시물을 참조했다.

 묘수풀이는 흔히 '박보'라고도 하며, 지거나 비기기 쉬운 모양에서 묘수를 내서 외통장군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찾는 문제다. 쉽게 말해 '이기는 방법을 찾는 퍼즐'이다. 묘수풀이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1. 낱장기묘수풀이
 2. 부동수묘수풀이
 3. 연장군묘수풀이
 4. 건너뜀연장군묘수풀이


 낱장기묘수풀이는 서로 기물이 적게 남은 상황에서 묘수를 내서 이기는 방법을 찾는 문제고, 부동수묘수풀이는 상대방의 기물들을 모두(또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이기는 방법을 찾는 문제다. 묘수풀이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은 연장군묘수풀이다. 매 수 장군을 불러 이겨야 하며, 한 수라도 장군을 놓치면 지게끔 설계한 문제다.

 건너뜀연장군묘수풀이는 연장군묘수풀이와 비슷하지만, 중간중간에 장군을 부르지 않는 순간이 있어도 바로 지지는 않는다. 문제도를 보면, 95가 비어 있지 않고 漢馬가 들어가 있어서 楚에서 한 수 장군을 부르지 않고 건너뛰어도 곧장 장군 맞지 않는다.

{3} 진시황제에게 칼을 날린 형가와 거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번오기 이야기

 풀이에 앞서, 형가와 번오기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겠다. 형가에 대한 기록은 <<사기>>의 <자객열전>에 있다. 진시황제로 잘 알려져 있는 영정(嬴政, B.C.259~B.C.210)이 중국을 통일하며 황제가 되기 전, 즉 전국칠웅(진, 초, 연, 제, 조, 한, 위)이 할거하던 전국시대의 막바지 이야기다.

 진나라 왕 영정이 나머지 여섯 나라를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연나라 태자의 부탁으로 자객 형가(?~B.C.227)가 영정을 암살하기로 했다. 형가는 진시황에게 접근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번오기를 떠올리게 된다.

 진나라 장군이었던 번오기는 무슨 일로 영정과 사이가 크게 틀어져 연나라로 망명한 상태였다. 영정은 번오기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걸 정도로 번오기를 죽이고 싶어했고, 번오기도 영정을 증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형가는 번오기의 머리를 들고 영정을 찾아간다면, 영정이 자신을 선뜻 만나 줄 것이라고 여겼다. 형가는 번오기를 찾아가 거사를 위해 죽어 줄 것을 부탁했고, 번오기는 기꺼이 스스로의 목을 베어 형가에게 내준다.

 번오기의 머리를 들고 영정의 코앞에 당도한 형가는, 별안간 비수를 꺼내 휘두르지만 영정의 소매가 잘려나갔을 뿐이었고, 형가가 마지막으로 날린 칼이 기둥에 박히면서 결국 암살에 실패하게 된다. 영정은 수년 뒤 중국을 통일하고 최초의 황제가 된다.

 서론은 여기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문제 풀이에 들어가겠다.

 

{4} 첫 수로써 큰 그림 그리기

 문제도로 돌아가 보자. 楚에서 이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묘수풀이를 풀 때는 무작정 손부터 대는 것보다는 외통장군까지 이르기 위한 중간중간의 과정을 차근차근 생각하는 게 좋다.

 그 과정의 첫걸음이 바로 '첫 수 찾기'다. 묘수풀이에서 첫 수를 모색할 때는, 두 번째 수 혹은 그 이후에 벌어질 전체적인 모양을 예상해야 한다. 이것이 수읽기이며, 요샛말로는 "큰 그림을 그린다."라고 표현한다. 아래 참고도를 보자.


 문제도에서, 단순하게 楚包를 지키며 상대의 기물을 취하고자 66楚馬가 87 漢馬를 취하며 장군하면, 참고도와 같이 85 漢兵 86 하면 楚에서는 더 이상 수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기물 하나하나에 연연하는 작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판 전체를 보며 깊은 수읽기를 해야 한다. 시야는 넓게, 계산은 치밀하게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도를 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사실이 있다. 楚車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漢車는 나쁜 자리를 차지해 오히려 漢宮의 동선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漢車가 날개를 달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楚에서 이기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니, 漢車를 제압하면서 반대로 楚車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漢車를 무력화할 만한 수단이 보이는가?


 첫 수는 66 楚馬가 54로 뜨며(다른 자리가 아닌 54로 뜨는 까닭은 다음 수를 보면 알게 된다.) 包장군을 부르는 것이다. 漢에서 車나 兵을 움직여 楚包의 길목을 방해하면 금방 질 것으로 보이니, 간단하게 87 漢馬로 06 楚包를 취하는 게 무난하다. 43 漢象 66으로 막는 수도 있으나, 이후 맥락은 비슷하니 漢馬가 楚包를 취하는 것만 살펴보겠다.


 그다음 수로, 54 楚馬가 35로 붙는 게 매우 중요하다. 이 모양까지 예상하고 첫 수로 楚馬가 54로 뜬 것이다.(사실 이 수까지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 이후의 수순은 크게 어렵지는 않다.) 95 漢馬가 빠져서 얼른 외통을 노리고 싶지만, 그러면 27 楚卒이 26에 붙어 漢에서 먼저 외통당한다. 따라서 漢에서 적절한 응수가 필요하다.

 漢車로 楚馬를 취하자니, 43 漢象의 멱이 절묘하게 막혀 있어 卒이 궁밭에 붙어 외통이 나온다. 그렇다고 漢車가 다른 곳으로 빠질 수도 없고, 漢包로 楚馬를 취하자니 車장군에 외통이다.

 묘수풀이를 시작하자마자 한 번 움직여 보지도 못하고 희생된 楚包의 죽음이 어찌 보면 허무하지만, 그 包가 희생하며 한 수를 벌어 준 덕분에 楚馬가 단숨에 漢의 궁밭에 진입해 적장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번오기의 희생으로 진나라 궁궐에 진입할 수 있었던 형가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제목을 '형가와 번오기'라고 지었다.

{5} 살려야 되는 기물과 희생해도 되는 기물을 판단하라

 하지만 진시황제가 몸을 날려 형가의 칼을 피했듯 漢에서도 단 하나의 살아날 구멍이 있다.


 15 漢包가 17로 가면 漢宮이 도망갈 수 있는 자리가 확보되며, 車장군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비가 된다. 27 卒이 包를 취하고 장군해도 漢宮이 숨으면 별다른 수가 없다.

 사실상 楚의 삼卒은 너무 깊숙이 침투해서 오히려 큰 힘을 내지 못한다. 궁밭 가까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뒤로 가지도 못하는 한 밭짜리다. 특히 27 卒은 오히려 楚車의 활로를 가로막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卒들이 너무 전진해 있기 때문에, 변수를 만들어 줄 楚馬가 없이는 卒들을 공격 범위를 피해 2선, 3선으로 올라오고자 노력할 漢宮을 제압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馬가 도망치자니 漢車의 활로가 트이는 것이 걱정이다.

 그렇다면 하나뿐인 楚馬를 살리면서 漢宮을 계속 압박하는 방법이 없을까? 이번에 둘 수가 첫 수라고 생각하고, 다시 넓고 치밀하게 큰 그림을 보자. 충분히 수읽기를 한 뒤 아래 그림을 보시기 바란다.


 <4수 진행도>에서 27 楚卒이 26에 붙어 16 漢宮을 15로 돌려 놓은 후, 26 楚卒이 25로 다시 한 밭 들어서며 漢車를 취하고 장군을 부른 장면이다. 24 漢士가 25 楚卒을 취할 수밖에 없을 때 楚馬가 살아나가는 것이다. 썩 좋지 않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卒을 내주고, 승리의 실마리가 되는 馬를 살리는(漢車까지 제압했으니 금상첨화다.) 계책. 삼십육계 중 열한 번째 계책인 이대도강(李代桃僵, 자두나무 대신 복숭아나무가 쓰러지다. 작은 손해를 보고 좋은 것을 취함.)이다.


 24 漢士가 25 楚卒을 취하고 멍군, 35 楚馬가 23으로 뛰어 장군까지 부른 모양이다. 漢에서 士를 다시 파서 희생시키면 금방 질 게 뻔하니, 15 漢宮이 아래 그림과 같이 16으로 돌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 수가 중요하다. 楚에서 더 이상 부를 장군도 없는데 무엇을 둬야 할까?

 

{6} 방심은 금물


 23 楚馬 44가 정답이다. 건너뜀연장군묘수풀이에서 장군을 부르지 않는 수를 둘 때는, (상대방이 적절히 응수하지 않을 시) 그다음 수부터 연장군으로 외통까지 볼 수 있는 그림이 나와야 한다. 쉽게 말해, 한 수 건너뛸 때는 더 이상 건너뛸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위 그림은 車장군에 바로 외통이 나오는 그림이므로, 漢에서 士를 파서 응수해야 된다.


 위와 같이 25 漢士 34로 외통을 피했을 때, "37 楚卒이 36에 붙으면 그다음에 卒과 車가 차례로 궁중에 붙으며 이긴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37 楚卒이 36으로 입궁하는 순간, 包 다리가 끊기며 17 漢包가 07로 가며 한 수 빠르게 장군한다. 빨리 이기는 것만 생각하고 공격 수순만 살피다가 순식간에 질 수 있다. 장기를 두거나 묘수풀이를 할 때는 내가 이기는 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이길 수 있는 수가 도사리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한다.(특히 멍군장군으로 수가 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卒이 바로 입궁할 게 아니라, 28 楚車가 먼저 18로 가서 包를 붙잡아 둬야 한다.(이는 12수로 漢士가 34가 아닌 다른 자리로 피해도 마찬가지다. 다만, 14나 24로 피했을 경우에는 士를 취해야 빨리 이긴다.)

 

{7} 마무리

 13수까지 진행되면,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漢宮이 당장 피할 자리가 15나 25 정도인데, 25에 가면 卒장을 맞고 결국 15로 다시 내려가야 하니 15로 피하는 것을 살펴보겠다.


 <13수 진행도>에서 16 漢宮 15, 16 楚車 17 包 때리며 장군, 39 漢象 16까지 진행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는 13 楚卒이 먼저 14로 붙어 장군해도 되고, 37 楚卒이 먼저 36에 붙어 한 수 건너뛰어도 된다. 똑같이 25수 외통인데, 37 楚卒이 먼저 36으로 붙는 것을 보겠다.


 <16수 진행도>에서, 37 楚卒 36, 95 漢馬 87, 13 楚卒 14 장군.


 <19수 진행도>에서, 15 漢宮 14 卒 때림, 17 楚車 16 象 때리고 장군, 14 漢宮 24. 이후 卒과 車가 차례로 궁중에 붙으면 이긴다. 꼭 卒이 먼저 붙어야 하는데, 車가 먼저 궁중에 붙으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된다.

 이 묘수풀이의 중요한 포인트는 세 가지 정도다.

 1) 처음에 馬가 54를 거쳐 35로 가며 漢車를 부동으로 묶는 동시에 漢象의 멱을 막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는가?

 2) 漢包가 17로 이동하며(4수 진행도) 漢宮이 피할 자리(15)가 확보되고 나서도 공격권을 놓치지 않고 수를 이어 나갈 수 있는가?

 3) 漢包가 장군하는 것을 방지하는가?

 

 장기판 위에서 한판 승부를 벌일 때도 이 묘수풀이처럼 적절한 희생에 뒤이은 날카로운 정면공격이 멋진 수를 낼 때가 많다. 형가가 번오기의 머리를 들고 가서 진시황제에게 비수를 날린 것처럼 말이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두나무를 대신해 복숭아나무가 쓰러지듯, 기막힌 타개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필요할 때가 있다.

 

(사)대한장기협회 편집국장

최민혁 三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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