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부터 열까지, 아홉부터 열까지

 장기짝은 한편에 열여섯이다. 대장 격인 宮이 하나, 크기가 큰 기물(대기물)이 여덟, 작은 기물(소기물)이 일곱이다. 대기물들은 시원시원하게 뻗어 나가거나(車, 包) 교묘하게 움직여(馬, 象) 다양한 변수를 창출한다. 그에 비해 소기물(士, 卒兵)들은 한 번에 한 밭밖에 움직이지 못한다. 다리가 짧은 것도 서러운데, 卒兵은 뒤로 가지 못하고 士는 궁밭을 벗어나지 못한다. 당연히 일반적으로 대기물이 소기물보다 가치가 크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士와 卒兵은 대기물들과는 다른 멋을 가지고 있다. 이제 '士'와 '卒'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겠다.

 공자(孔子, B.C.551~B.C.479)는 "推十合一爲士.(열 가지를 미루어 보아 하나로 합하는 것이 '士'다.)"라고 했다. 하나(一)에서 출발해 열(十)까지를 익히고, 그 열을 다시 하나로 취합할 수 있는 사람이 '士'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卒'은 어떨까? '卒'은 '卆'이라고도 쓴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쓰지 않는 글자긴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중 아홉(九)과 열만을 품고 있는 '卆'은 말단의 상징과도 같은 글자다.

 

{2} 마칠 졸

 그러니 '졸개'나 '무명소졸' 등의 낱말에서 나타나듯, '卒'이라는 말은 직위가 낮거나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잘 쓰인다. 특히, '졸로 보다(알다)'라는 표현을 흔히들 쓴다. 장기판 위의 卒兵만큼이나 만만하고 우습다는 말이다. 또 宮을 제외하고 다른 장기짝들은 한편에 둘씩 있으나 卒兵은 다섯씩 있으니, 卒兵이 가장 약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하지만 '卒'은 '군사 졸'일 뿐인가? '卒'은 '마칠 졸'이기도 하다. '卒(마칠 졸)'은 '終(마칠 종)'과 비슷하지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12년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종업식(終業式)은 열두 번을 치른다. 하지만 졸업식(卒業式)은 세 번뿐이다. 꽃다발과 눈물과 함께 치른다. '終'이 '일단락'이라면, '卒'은 말 그대로 '마침', '끝냄'이다.

 아래 그림을 보자.

 <그림 1>, <그림 2>, <그림 3>은 楚에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림 4>는 이긴다. 양馬, 양包, 양象이 하지 못하는 일을 양卒은 해낸다.

 <그림 1>, <그림 5>, <그림 6>은 楚에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림 7>은 이긴다. 馬馬, 馬包, 馬象이 하지 못하는 일을 馬卒은 해낸다. 卒이 없다면 하루 종일 둬도 이기지 못하는 것을, 卒이 있기 때문에 장기 한판을 쉽게 '마칠' 수 있는 것이다.

 

{3} 문무겸전, 희생정신

 '士'는 '선비 사'라고 한다. '선비'라는 말을 들으면, '학문을 닦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른다. 장기판 위의 士를 싸움에는 나서지 않고 대장 옆에서 꾀를 내는 모사(謀士)나 책사(策士)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사림(士林), 박사(博士), 변호사(辯護士) 등등 '士'가 공부에 몰두하고 머리를 쓰는 사람(文)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경우는 많지만 비단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부사관(副士官), 검사(劍士), 천하장사(天下壯士) 등등 군인이나 힘을 잘 쓰는 사람(武)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경우도 많다. 한(漢)나라 개국의 일등 공신인 소하(蕭何, ?~B.C.193)는 불세출의 명장 한신(韓信, ?~B.C.196)을 두고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선비.)'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士'는 문무(文武)의 겸비인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자객 예양(豫讓, ?~?)은 "士爲知己者死, 女爲說己者容.(선비는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꾸민다. <<사기>> <자객열전>에 나온다.)"이라는 말을 남겼다. 장기판 위의 士도 마찬가지다. 宮이 양士를 믿고 곁에 두기에, 士는 기꺼이 죽음을 불사하고 宮을 지킨다.

 

{4} 짧은 발걸음만으로 내는 묘수

 앞서 말했다시피, 士와 卒兵의 움직임은 매우 제한적이다. 한 번에 고작 한 밭일뿐더러, 누구는 궁밭을 벗어나지 못하고, 누구는 전좌우 삼면으로만 내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장기판 위에 宮과 士, 卒兵들만 있다면 어떨까? 느릿느릿 지루하고 뻔한 싸움이 일어날까?

 





이 다섯 개의 묘수풀이는 宮과 士, 兵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다. 兵이 침입하는 위치, 팔방을 사수하는 士의 분전, 宮이 올라서는 타이밍. 치는 쪽과 지키는 쪽 모두 한 수 한 수에 고심을 하게 되는 미묘한 문제들이다. 가진 거라고는 한 밭짜리 짧은 발걸음뿐인 친구들이지만, 재미있는 묘수를 내기에는 충분하다.

 

{5} 장기는 士와 卒兵의 싸움?

 우리 장기는 중국 진(秦)나라가 멸망한(B.C.207) 이후의 초한 전쟁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당시 초나라 왕은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불리던 항우(項羽, B.C.232~B.C.202)였고, 한나라 왕은 유방(劉邦, B.C.247~B.C.195)이었다. 항우는 전국시대 초나라의 대장군 항연(項燕, ?~B.C.223)의 손자다. 항씨 집안은 대대로 초나라의 장군을 지냈다고 하니, 항우는 사대부(士大夫)였다고 할 수 있다. 항우가 젊은 나이에 초나라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명문가의 자손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유방은 평민이었다. 그는 사수정(泗水亭)이라는 작은 마을의 정장(지금으로 치면 이장쯤이다.) 출신으로, 나중에 항씨 집안이 지휘하는 군대에 들어간다. 항우의 병졸에 불과했던 평민 유방이 제후국의 왕을 거쳐, 초나라를 정벌하고 결국 중원을 통일한다. 현재 '초한지(楚漢志)'라는 제목을 달고 널리 읽히고 있는 이야기는, 사대부 집안의 명장 항우와 출신도 보잘것없고 눈에 띄는 재주도 없었던 유방의 싸움. 즉 '士'와 '卒兵'의 처절한 싸움을 다룬 이야기다.

 

{6} 卒은 장기판 전체를 품고 있다

 <<설문해자>>에는 '士'라는 글자를 "數始於一, 終於十. 从一十.(수는 하나에서 시작해서 열에서 끝난다. '士'는 하나와 열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설명한다. 士는 시작부터 끝. 즉 모든 것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士는 거창한 뜻을 가진 데 비해, 卒은 말단이니 卒이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卒은 장기판 전체를 아우른다. 앞서 '卒'을 속자로 '卆'이라고 쓴다는 것을 밝혔다. 아홉과 열. 장기판은 세로가 아홉 줄, 가로가 열 줄이다. 그러므로 '卆', 즉 '卒'은 장기판에 가장 어울리는 한자다. 장기판만큼은 卒의 세상이다.

{7} 참고 문헌
염정삼,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7.
이문열, <<초한지>>, 민음사, 2008.
사마천, <자객열전>, <<사기>>.

대한장기협회 최민혁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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