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제의 대신이었다가 황제가 된 양조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은 문학을 사랑하는 황제였다. 일찍이 바둑 발전을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기를 만들었던 황제이다. 바둑과 관련된 그의 사료 기록 중에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아마도 그가 바둑판 옆에서 침식을 잊었다는 고사와 바둑을 두다 뜻밖의 오살(誤殺)을 범했다는 두 가지 고사가 떠오를 것이다. 

기원전 501년, 남조 제나라는 내란에 빠졌는데 용저우(雍州)의 자사(刺史:지방장관)인 소연(蕭衍)이 기병을 하여 건강(建康)을 공격하여 황제자리를 빼앗고 국호를 양(梁)으로 바꿨다. 소연은 남조 제나라때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던 인물로 심약(沈約), 사조(謝朓), 육기(陸機) 등과 함께 금릉팔우(金陵八友)로 불리며 남북조시대의 문화를 대표했다. 천자의 자리에 오른 후 그는 바둑에 대한 열정도 사관에 의해 기록하도록 했다. 

양나라 초기 역사서인 양서(梁書)의 기록에 따르면 양무제는 자주 신하들을 궁으로 불러 바둑을 두었으며, 정력이 왕성하여 늘 상대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군신의 예의에 이끌려 양무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 중 바둑 실력이 높은 이들의 고충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어떤 대신이 양무제와 바둑을 두면서 졸았다. 이에 황제는 「모습이 상갓집 개 같기도 하고, 바람에 나부끼는 현풍채 같기도 하다」는 글귀를 그에게 보내기도 했다. 바둑을 좋아하는 양무제는 직접 바둑을 두는데 그치지 않고 친히 일련의 바둑활동을 주최하기도 했다. 특히, 전조(남조제)에 있었던 것을 모방하여 대규모 바둑활동을 개최했다. 또한 후에 친히 바둑에 관한 저서인 『위기부(圍棋賦)』, 『위기품(圍棋品)』, 『기평(棋評)』등을 남겼지만 애석하게도 남아있지는 않는다. 

바둑을 너무 좋아했던 양 무제는 바둑알을 들고 바둑판에 빠지면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이 흑백의 바둑이 결코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는 바둑에 빠져서 사람을 잘못 죽이는 일을 저질렀다. 
합두사(榼頭師)는 당시 유명한 고승으로 도행의 최경지에 이르러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오살’을 당한 것을 볼 때 그는 자신의 길흉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루는 양무제가 궁중에서 고승의 불경을 들으려고 사람을 시켜 합두사를 불러오라고 시켰다. 합두사가 오기를 기다리다 손이 근질근질했던 양무제는 한 대신을 불러 바둑을 두며 합두사를 기다리기로 했다. 합두사는 부름을 받고 즉시 궁중으로 갔는데 애석하게도 그가 도착한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시종이 안으로 들어가 합두사의 도착을 아뢰는 순간 황제는 때마침 바둑판에서 격전이 벌이고 있어 합두사의 도착 보고를 듣지 못했다. 바둑에 몰두해 있던 황제는 상대의 약점을 파고 들어 일격을 가하면서 “죽어라(죽여라)”라고 큰 소리를 쳤다. 이에 밖에서 황제의 뜻을 잘못 알아들은 시종들이 병사를 불러 합두사를 형장에 묶어 참수했다. 

대국이 끝나고 난 후 양무제는 자신이 합두사를 호출한 것이 생각나서 옆에 있는 시종들에게 물으니 “명을 받들어 그 자를 처형했사옵니다”라고 말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아연질색하며 후회했다. 

양무제 시대의 바둑계는 비록 여전히 귀족이 주를 이루었지만 출신이 미천한 사람도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바둑활동의 전개의 대량의 바둑작품이 세상에 나오면서 바둑발전도 최고조에 달했다. 자료에 따르면 양무제 시대의 기사 명부 책자에 오른 사람은 수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번영의 배후에는 나날이 풍미해지는 한 왕조의 그림자도 있었다. 양무제 말년, 간신배들이 기회를 틈타 난을 일으켜 4년 동안 ‘후경지란(侯景之亂)’으로 불리는 무장반란 사건을 겪은 후 바둑의 황금시기는 쇠락해 갔다. [월간바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브레인스포츠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