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故 박계도 八段께서는, "장기는 죽은 기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평소 통 안에 담겨 있을 때는 그냥 플라스틱(또는 나무나 다른 재료) 조각일 뿐이지만, 장기판 위에 진을 치는 동시에 살아서 움직이고 살아서 싸우는 이 물건은 뭇 장기인의 보물이다.

 그런데 '이 물건'을 지칭하는 데 어떤 표현을 써야 할까? 일반적으로 '장기알'이라고 부르고, '장기짝'이나 '장기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표현들 중 어느 게 옳은 표현이고 어느 게 틀린 표현인지, 또 그 표현들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2} 청홍이 짝을 이루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하 '사전')에는 '장기짝'이 표준어로 등재돼 있다. 이 낱말이 포함된 속담으로 '장기짝 맞듯'(영락없이 꼭 들어맞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실려 있다. '짝'이라는 한 글자에는 심오한 뜻이 있다. 학교 내지는 유치원에서, 3/4박자를 처음 배울 때 꼭 부르는 노래가 있다. 한국 아동문학의 대가 석동(石童) 윤석중(尹石重, 1911~2003) 선생이 작사한 '똑같아요'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윷가락 네 짝이 똑같아요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나, '짝'이라는 낱말에 주목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짝'은 둘(또는 그 이상)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그런 것의 각각을 세는 단위로도 쓰인다.) 비유적으로 부부나 연인 관계를 이르기도 한다.

 "길 가던 사람이 신발 한 짝만 주우면 어디에 쓰겠나? 그러니 다른 짝까지 던진 것이네. 한 짝씩은 서로에게 아무 쓸모가 없지만, 신발 한 켤레를 주운 사람은 신고 다닐 수 있는 것이지."

 모한다스 간디(Gandhi, Mohandas Karamchand,1869~1948)가 기차 밖으로 신발 한 짝을 실수로 떨어뜨리고 나서, 남은 한 짝까지 벗어 던져 버리며 한 말이다. 젓가락이 한 짝이면 쓸모가 없고, 신발도 한 짝이면 쓸모가 없다. 그래서 영어로는 'chopsticks', 'shoes'라고 한다. 의도적으로 's'를 붙여 늘 짝을 이룸을 나타낸다. 장기짝은 서른둘이 청홍으로 짝을 지어 열여섯 켤레를 이루고, 열여섯 켤레가 곧 한 벌이 된다. 젓가락과 신발은 하나가 없어지면 한 켤레가 쓸모없어지지만, 장기짝은 하나가 없어지면 한 벌이 통째로 쓸모가 없어진다.

 그래서 어쩌다가 卒兵 같은 것을 하나 잃어버리면, 바둑알이나 주사위 같은 것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이때는 '짝짝이'라는 낱말을 쓸 수 있겠다. 쌍을 이루는 것을 짝이라고 하지만, '짝짝이'와 같이 두 번 겹쳐 쓰이거나 '짝사랑', '짝눈'처럼 접두사로 쓰이면 쌍을 이루지 못한 것(또는 쌍을 이루는 것끼리 서로 조화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짝'은 둘이 한 쌍이 되는 것을 이르지만, 역설적으로 짝을 맞추지 못해 외로운 존재를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한 반의 구성원이 '짝수'가 아닌 홀수일 때, 수학여행 버스에 타면 다들 두 사람씩 짝을 이루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짝사랑하듯 혼자 앉아야 한다.

 어쨌든, 장기는 청홍이 같은 짝을 이룬다는 점은 "장기는 公平하다.", "장기는 가장 公平한 戰爭이다."라는 최성우 九段과 김보민 初段의 지론과 일맥상통한다.

 

{3} 알은 알짜배기다

 '바둑알'은 표준어 취급을 받지만, '장기알'은 사전에 실려 있지 않다. '장기 알' 정도로 지칭하면 크게 무리는 없겠다. 위에서 말했듯 '장기알'이라는 표현은 가장 사랑받는 표현이다. 어감도 동글동글하니 좋다.

 포유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동물의 암컷은 알을 낳는다. 그런데 사람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건국신화(고구려, 신라, 가야 등)에 자주 등장한다. 이는 건국 군주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해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알'은 생명의 정수(보통의 알)이면서 신성성의 상징물(신화에서의 알)인 것이다.

 '완전식품' 몇 가지를 꼽으라면 달걀, 우유, 고등어 정도가 나올 것이다. 그중에서도 달걀을 제일로 친다. '단백질(蛋白質)'이라는 말도 새알(蛋)의 흰(白) 부분이라는 뜻이다. 닭의 정수인 이 달걀이 겉껍질, 속껍질, 흰자, 노른자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면 지구가 지각, 맨틀, 외핵, 내핵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꼭 같다. 또 줄탁동시[啐啄同時, 또는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도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까고 나오기 위해서는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동시에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연구하며 성장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부풀려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달걀을 먹는 것은 닭 한 마리를 먹는 것과 같고, 작은 지구를 먹는 것과 같고, 어미와 병아리가 함께 쪼는 지혜를 먹는 것과 같다. 알은 매우 '알찬' 음식이다.

 알은 생명의 정수고, 신성한 존재면서, 작은 지구와도 같고, 영양가 있는 먹을거리다. 그러니 속이 꽉 차서 튼실한 것(알토란, 알통, 배추 알)과 유용하고 유익한 것[알짜(배기), 알차다, 전구 알]을 비유적으로 '알'이라는 말로써 표현한다. '장기 알'이라는 표현은 장기짝을 최고로 존중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4} 'hores'와 'piece'

 '장기말'은 틀린 표현이다. 사전에서 '장기짝'으로 고쳐 쓸 것을 고지하고 있다. 사전에 나오는 '말'의 뜻풀이는 다음과 같다.

 「1」 『민속』 고누나 윷놀이 따위를 할 때 말판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옮기는 패.

 「2」 『체육』 ‘馬’ 자를 새긴 장기짝. 한 편에 둘씩 넷이 있고, 앞으로 두 칸 옆으로 한 칸, 또는 앞으로 한 칸 옆으로 두 칸 건너 있는 밭으로 다닌다.

 「1」에서 예로 든 놀이는 고누와 윷놀이다. 고누와 윷놀이의 말은 편에 따라 색만 다르지 모두 똑같이 생겼다. 똑같이 생겼다 함은 역할도 아주 같다는 것이다. 일곱 가지의 역할이 있는 알들에게는 '말'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 게다가 「2」는 馬가 새겨진 장기짝을 '말'이라고도 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니 서른두 개의 장기짝을 '장기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더욱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2」를 보니 고누나 윷놀이를 할 때 쓰는 '말'(piece)과 포유동물 '말'(horse)이 연관이 있는 듯한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다.

 {5} '棋'와 '碁'

 최서호 初段이 필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장기쪽이 몇 쪽인지 아니? 서른두 쪽이 아니라 서른네 쪽이야. 장기를 두는 두 사람까지 포함해서 말이지."
멋있는 지론이지만, '장기쪽'도 틀린 표현이다. '장기말'과 마찬가지로 사전에서 '장기짝'으로 고쳐 쓸 것을 고지하고 있다.
정말 가끔 장기짝을 '장깃돌'이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있다. '바둑돌'과 혼동한 것인 듯한데, 바둑돌은 예로부터 돌로 만들었을 것이고, 장기짝은 나무로 만들었을 것이다. 똑같은 '기'지만 장기는 '棋', 바둑은 '碁' 자를 쓰는 까닭이다.
글이 길었지만 '장기짝'과 '장기 알' 정도가 어문규범상 옳은 표현이라는 것인데, 짝도 알도 싫다면 그냥 '장기'라고 지칭해도 된다.

{6} 맺음말

 글을 시작하며, 故 박계도 八段의 지론 "장기는 죽은 기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를 인용했다. 여담으로, 서구에서는 서양장기(체스)에 쓰이는 기물들을 'chessman'이라고 통칭한다. 나름대로 'man'을 붙여 서른두 개의 기물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다. 독자분들께서는 큰 뜻 없이 그냥 쓰시던 표현이었겠지만, 우리도 '짝'과 '알'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죽은 기물에 의미와 생명을 충분히 불어넣고 있었다.

(사)대한장기협회 최민혁 프로 3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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