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숨을 굴을 파 놓는다

 '교토삼굴'.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숨을 굴을 파 놓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교묘하게 잘 숨어 재난을 피함을 이르는 말이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토영삼굴(兔營三窟)'이 있다. 출전은 한(漢)나라의 학자 유향(劉向, B.C.77~B.C.6)이 쓴 <<전국책>>의 <제책> 4편이다.

 중국 전국시대(B.C.403~B.C.221) 때는 '전국칠웅'이라고 해서 일곱 나라[진(秦), 초(楚), 연(燕), 제(齊), 조(趙), 한(韓), 위(魏)]가 중국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전국책>>은 일곱 나라의 군주, 장군, 선비들의 처세 책략이 담긴 책이다. '교토삼굴'의 고사는 제나라의 재상 맹상군[孟嘗君, ?~B.C.278. 본명은 전문(田文)이다.]과 그의 식객인 풍훤[馮諼, ?~?. <<사기>>에는 풍환(馮驩)이라고 돼 있다.]의 처세술이 담긴 이야기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2} 굴이 세 개라 해도 겨우 죽음을 면할 뿐

 맹상군은 자신의 봉지인 '설[薛. 봉지의 이름이 '설'이기 때문에 맹상군을 '설공(薛公)'이라고도 부른다.]' 땅의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줬으나, 돈을 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해서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조차 내지 못했다. 이에 맹상군의 집에서 일없이 지내던 풍훤이 자원해서 설 땅으로 맹상군 대신 빚을 받으러 가게 된다. 풍훤이 길을 떠나기 전에 맹상군에게 물었다.

 "빚을 다 받으면 무슨 물건을 사 가지고 올까요?"

 맹상군이 말하기를, "당신이 보기에 우리 집에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면 됩니다." 했다. 풍훤은 설 땅으로 가서, 빚을 받기는커녕 사람들을 모아 놓고 차용증을 불태워 빚을 모두 없애 줬다. 그러고는 맹상군에게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하께서는 조그만 봉지의 백성을 사랑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두고 돈놀이를 해서 이익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 끝에 귀하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빚을 모두 면제해 줬습니다. 저는 귀하를 위해 '의리'를 사 온 것입니다."

 이후에 맹상군은 권고사직을 당해 설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설 땅의 백성들은 당연히 맹상군에게 충성을 보였다. 맹상군이 기뻐하자 풍훤이 이렇게 말했다.

 "꾀 많은 토끼가 굴이 세 개라 해도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을 뿐입니다.(狡兔有三窟, 僅得免其死耳.) 지금 귀하는 겨우 하나의 굴에 들어왔으니, 아직 안심할 처지는 못 됩니다. 청컨대 귀하를 위해 굴 두 개를 더 파 드리겠습니다."

 이후에 풍훤의 계책으로 맹상군이 복직됐고, 설 땅에 종묘를 지어 고향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맹상군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재상 노릇을 하면서도 한 번의 작은 재앙조차 만나지 않았다.

 

{3} 궁밭의 삼굴

 장기 한 벌은 서른두 짝인데, 그중 특히 중요한 것은 단연 宮이다. 또 장기판은 아흔 개의 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특히 공격과 수비에 신경 써야 할 구역은 한편에 아홉 개씩 있는 궁밭이다.


 아홉 개의 궁밭 중에서, 가운데(궁중)를 제외한 밭은 모두 위 그림과 같이 세 군데로 통한다. 宮이 가운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면, 당장 피신할 수 있는 세 개의 굴(삼굴)에 어떤 기물을 배치할지, 아니면 배치하지 않고 비워 둘지 상황을 봐서 잘 선택해야 한다. 아래의 간단한 예시 두 가지를 보자.


 楚는 양士를 제외하면 남은 기물이 象 하나뿐이다. 漢에서는 양車가 있어서, 楚에서 잘못 대응하면 지게 된다. 楚에서 지지 않으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궁밭의 삼굴을 적절히 운영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충분히 생각해 보고 아래 정답을 보자.


 우선 위와 같이 象으로 장군을 부른 뒤,


 그 象이 78을 거쳐 06으로 들어오면 비긴다. 양車로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楚에서 삼굴에 모두 적절한 수비 기물을 배치해서, 위기 상황을 타개한 것이다.

 하지만 삼굴을 모두 막아 놓는다고 능사는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삼굴이 모두 막혀 있는 게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楚宮의 주변으로 호위하고 있는 기물들이 많지만, 오히려 위험하다. 楚의 삼굴이 막혀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漢에서 이득을 볼 수 있다.


 <예시 2>에서, 78에 있던 漢象이 55로 이동하며 車를 걸었다. 이때 楚에서는 車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車를 살리고자 한다면 72 卒이 55 象에게 얻어맞으며 지게 된다. 아래 그림과 같은 것이다.


 이 그림에서, 楚의 삼굴(94, 95, 05) 중 하나라도 비어 있었다면, 象장군에 외통을 맞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楚의 토끼는 제 기물에 굴이 막혀 피신하지 못한 것이다.

 <예시 1>은 삼굴을 막아서 죽음을 면한 경우고, <예시 2>는 삼굴이 막혀 죽음을 면치 못한 경우다. 삼굴을 무조건 막는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비워 둔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장기판 위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따라 삼굴을 적절히 운영하는 게 중요하다. 내 굴에는 기물을 효과적으로 배치해야 하고, 상대의 굴에는 위협을 가해 宮의 움직임을 제한해야 한다.



{4} 명국으로 이해하는 교토삼굴

 실전 대국을 통해 삼굴 운영의 중요성을 알아보겠다. 치열했던 2021 ICOC배 국가대표 선발전 16강, 김경중 국수님(楚)과 김응구 선생님(漢)의 대국이다.

 


 46수까지 진행된 상황이다. 楚車가 漢의 진영 깊숙이 들어가자, 漢에서는 하귀에 있던 士를 궁중으로 넣었다. 宮의 근처로 양士를 배치해 수비를 강화했지만, 도리어 包와 양士가 삼굴을 막고 있어 답답한 형국이다. 楚의 귀윗象의 공격에 취약해 보인다.

 궁밭의 중앙, 즉 궁중은 가장 큰 굴이다. 나머지 굴들은 세 군데로 통하지만, 궁중만은 여덟 군데로 통한다. 漢의 궁중은 士로 막힌 것에 비해, 楚는 宮이 직접 궁중에 위치해 있어 여러 군데로 통할 수 있다. 漢車의 위협이 있긴 하지만, 楚馬를 귀에 배치하면 수비가 된다.

 


 46수로 漢象이 楚의 양包를 걸자, 47수로 楚의 중包가 漢의 귀馬를 취하며 장군을 부른 장면이다. 이때도 包를 士로 취해서 漢宮이 들어갈 굴을 파는 전략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실전에서는 象으로 包를 취하며 馬를 걸었다. 삼굴은 그대로 막혀 있는 상황이었지만, 馬가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실리를 추구할 수 있는 수였다.

 


 종국도다. 바짝 붙어 장군을 부른 車를 하包로 취할 수밖에 없다. 그때 楚馬가 들어가 장군하면, 두 개의 굴은 막혀 있고, 나머지 하나의 굴은 楚包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한다. 漢에서도 멋있는 장기를 뒀지만 아쉬운 패배를 맛본 장면이다.

 두 대국자께서 워낙 관록 있으셔서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왔지만, 모두 이야기하자면 본고의 주제와는 멀어질 것 같아서 대국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만 다룬다. 대국 영상은 유튜브 '대한장기협회TV' 채널에서 볼 수 있다.(두 분의 대국 영상을 보시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누르고 영상의 14분부터 46분까지 감상하시면 되겠습니다.)

 2021 ICOC배 국가대표 선발전 16강(김경중 九段 對 김응구 5단)



{5} 개와 닭의 울음소리도 쓸모가 있다

 맹상군은 가난하고 별다른 특기도 없는 풍훤을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서 풍훤이 칼을 두드리며 "장검아, 돌아가자! 여기에서는 식사 때 생선 한 점 없구나.(長鋏歸來乎! 食無魚.)" 하며 보채자 생선과 고기를 대접했고, 또 나중에 "장검아, 돌아가자! 여기에서는 타고 다닐 수레도 없구나.(長鋏歸來乎! 出無車.)" 하며 보채자 외출할 때 수레를 내줬다. 또 얼마 후 "장검아, 돌아가자! 여기에서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구나.(長鋏歸來乎! 無以爲家.)" 하며 보채자 풍훤의 노모에게 사람을 보내 먹을 것과 일용품을 제공했다.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맹상군은 수천이 되는 식객을 잘 대접했다고 한다. 개 흉내를 잘 내는 식객과 닭 흉내를 잘 내는 식객을 받아들여 대접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들을 비웃었지만, 맹상군은 그들 덕분에 사지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다.['계명구도(鷄鳴狗盜, 비굴하게 남을 속이는 하찮은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라는 말의 유래가 되는 고사다.] 또 가난하고 재주도 없는 풍훤 덕분에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잘 수 있었다.

 장기도 마찬가지다. 큰 쓸모가 없어 보이는 기물이 후반에 가서 큰 힘을 내는 경우가 있다. 서로 살아 있는 기물이 몇 없을 때, 변방에 있던 卒兵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얼마나 든든한가? 작은 기물 하나라도, 훗날 내 목숨을 살려 줄 수 있는 식객이라고 생각하고 아껴야 할 것이다. 맹상군의 지혜는 장기를 둘 때, 세상을 살아갈 때 가슴에 품을 만하다.

{6} 참고 문헌

유향 지음, 임동석 역주, <<전국책>>, 동서문화사, 2009.
사마천, <맹상군열전>, <<사기>>

(사)대한장기협회 편집국장 최민혁 三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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